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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ssage] 팔복 2 – 애통하는 자

작성자
기독교교육리더십연구소
작성일
2024-03-07 12:05
조회
11
메신저. 김성중 목사

마태복음 5장 4절

오늘 말씀은 팔복의 2번째 말씀으로,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는 자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상식을 뛰어넘는 말씀입니다. 애통하는 자가 무슨 복이 있는 자입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는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에 나온 "애통하다"의 헬라어 원어는 "펜데오"로서 죽은 자에 대한 슬픔을 나타내는 데 쓰여지던 단어였습니다. 그냥 슬픈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을 때, 울고 슬퍼하는 그 슬픔입니다. 눈물이 쏟아져 나오는 처절한 슬픔입니다. 그것이 애통함입니다. 여러분은 언제 이와 같이 슬픈 눈물을 흘려 보았습니까?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어떤 의미로서 슬퍼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셨을까요? 그냥 슬픈 일 당해서 슬퍼하는 사람이 복이 있다는 의미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냥 슬퍼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이유가 있어서 슬퍼하는 것입니다. 그럼, 무슨 이유로 슬퍼하는 것입니까? 애통은 어떤 슬픔인지에 대해 3가지로 나누어 알아봅시다!

첫째, 나의 부족한 모습, 죄된 모습을 바라보면서 나의 한계를 절감하고, 하나님께 회개하는 슬픔입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슬픔을 경험해 보았습니까? 나의 부족한 모습, 반복된 습관화된 죄의 모습 때문에 자기 자신을 한탄해하면서, 나의 한계를 느끼면서 하나님께 감히 얼굴을 들지 못하고 울며 기도하는 그 슬픔....그것을 경험해 보았습니까? 이와 같은 슬픔을 경험해 본 자가 하나님의 무한하신 은혜를 깊이 느낄 수 있는 자입니다.

누가복음 7장 36절에서 50절을 보면, 죄 많은 한 여인이 나옵니다. 성경에서 그 여인은 "죄인"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 여자는 창녀였습니다. 동네에서 사람들 앞에 당당히 나설 수 없는 부끄러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동네에 율법을 잘 지키고 깨끗하다고 소문난 바리새인의 집에 예수님께서 오셨다는 소문을 이 여자가 듣습니다. 이 여자가 당당하게 예수님을 만나러 갈 수 있었을까요? 절대 그렇게는 못 갔겠지요? 그런데 이 여자는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정말 힘들게 바리새인의 집에 갑니다. 바리새인의 집에 가는데, 빈손으로 가지 않고, 자기의 전재산과도 같은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갑니다. 그 향유옥합은 너무나 귀한 보물이었습니다. 그것을 가지고 예수님께 갑니다. 그리고 사람들을 비집고 가서 예수님을 만납니다. 그러나 38절에 보면, 너무나 감동적인 장면이 나옵니다. 이 여인은 감히 예수님 앞에 설 수 없는 죄인임을 스스로 알기에 예수님 뒤로 갑니다. 그리고 감히 예수님의 눈을 바라볼 수 없어 고개를 숙이고 예수님의 발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한 없이 울기만 합니다. 눈물 한 방울 한 방울이 예수님의 발 위에 떨어집니다. 예수님의 발을 바라보면서 자신의 죄가 너무도 큰 것을 깨달으며, 자신의 답답한 현실과 죄된 한계를 깨달으며 울고 또 울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밖에는 이 죄의 문제를 해결해주실 분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예수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눈물을 흘렸습니다.

여러분, 바로 이 애통함, 슬퍼함입니다. 자신의 한계와 죄된 모습을 바라보면서 예수님 앞에 우는 모습입니다. 당당하게 예수님 앞에 나갈 수도 없이 예수님 뒤에 서는 마음,,"나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실존적 고백이 나오는 마음...그 마음이 바로 애통하는 마음입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에게 위로함을 주십니다. 누가복음 7장 48절을 보면, "네 죄 사함을 얻었느니라."고 나와 있습니다. 위로함의 은혜로 채워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항상 부족한 모습, 자신이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마음이 바로 애통하는 마음이며, 새로워질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마음입니다. "나는 완벽해,,,나는 의인이야, 나는 죄가 없어..나는 법 없이 살 사람이야"라고 떠들고 다니는 사람은 바리새인과 같은 겉만 뻔지르르한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스스로 잘 살기에 예수님의 위로함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항상 부족해지십시오. 자신의 부족함, 죄에 대한 한계를 느끼십시오. 눈물이 쏟아집니다.

자신의 부족함을 내어놓는 사람,,,내가 잘 나서가 아닌, 하나님의 은혜로 내가 여기까지 살아왔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애통하는 사람입니다.

둘째, 타인의 아픔을 동감하는 슬픔입니다.

기독교는 철저하게 타인 중심의 종교입니다. 자신이 잘 먹고 잘 사는 종교가 아닌, 다른 사람이 울 때 같이 울어주고, 같이 슬퍼하는 종교입니다. 로마서 12:15에는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고 나옵니다. 그러나 우리는 즐거워하는 자를 보고는 배아퍼하고, 우는 자들을 보면, 자신이 기뻐합니다. "타인의 기쁨은 내 슬픔이요, 타인의 슬픔은 내 기쁨이다." 이러한 삶의 자세를 가지고서는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기독교인의 인간관계의 모습은 즐거워하는 자가 있으면, 같이 즐거워해 주고, 우는 자들이 있으면 같이 울어주는 것입니다.

특히 슬퍼하는 자를 그냥 내버려두지 마시기 바랍니다. 즐거워하는 자는 스스로 좋기 때문에 같이 괜찮지만, 슬퍼하는 자가 혼자 있으면 그것만큼 비참한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삶의 습관 중에 "바빠서 결혼식에는 못 가도 장례식에는 가자!"라는 습관이 있습니다. 장례식에는 꼭 참석하십시오. 사람을 얻습니다. 슬픈 자를 위로하는 것이 바로 예수님이 말씀하신 애통함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나사로가 죽음에 대해 그의 누이들이 울 때, 같이 우셨습니다. 몇 분 후면 예수님이 살리실 것인데도 예수님은 옆에 있는 사람들이 슬퍼서 울자 같이 우셨습니다. 요한복음 11장 33~35절을 보면 다음과 같이 나와 있습니다. "예수께서 그의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의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통분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사 가라사대 그를 어디에 두었느냐 가로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예수님은 애통함이 넘치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는 우리를 향해 애통해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애통함은 감정의 동감입니다. 동감은 영어로 compassion입니다. 다른 사람의 감정 상태에 들어가 그 감정을 같이 공유하는 것입니다. 친구의 부모님이 돌아가셨다면, 우리의 부모님이라고 생각하며 그 감정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친구의 슬픈 감정을 같이 공유하는 것입니다.

동정이 아닙니다. 동정은 나는 그렇지 않다는 무의식적인 우월감이 있어서 불쌍히 여기는 것입니다. 내가 가난한 자를 도와줄 때도 동정으로 도와서는 안됩니다. 나는 가난하지 않는데, 저 사람은 가난하니까 내가 우월한 입장에서 도와줘야겠다는 동정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내가 가난하고 힘들 때를 생각하고, 내가 오늘 당장 먹을 것이 없다면 어떻게 할 것인지를 생각하면서 가난한 사람의 입장이 되어서 그 사람의 슬픈 감정을 동감하면서 도와주는 것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구제이며, 애통함의 실천입니다.

주위 사람 중에 상실로 인해 슬퍼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여러분의 곁에서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을 때를 생각하십시오. 그 사람과 같이 그 슬픈 감정을 나누십시오. 슬픔은 나누면 반으로 줄어드는 것입니다.

여러분, 다른 사람을 배려하시고, 다른 사람이 슬픔에 처하면, 심지어 나와 친하지 않은 사람이 슬픔에 처해도 그 사람의 슬픔을 공감해주고, 같이 울어주면서 위로해주시기 바랍니다.

셋째, 주님의 일을 하다가 받는 고난 중에 흘리는 눈물입니다.

주님의 일을 하다가, 주님의 뜻을 지키다가, 주님의 정의를 지키다가 당하는 고난이 있습니다. 그 고난 중에 흘리는 눈물이 애통의 눈물입니다.

기독교 역사는 선교의 역사입니다. 선교를 하다가 고난 중에 흘리는 눈물은 수없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 눈물으로 기독교의 복음은 전세계에 퍼지게 된 것입니다.

바울은 사도행전 20장 17-21절에서 에베소 교회 장로들과 마지막 작별 인사를 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지금까지 내가 항상 너희 가운데서 어떻게 행한 것을 너희도 아는바니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를 인하여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꺼림이 없이 너희에게 전하여 가르치고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거한 것이라.”

바울이 주를 전하다가 얼마나 많은 시련을 겪었습니까? 얼마나 많은 고난을 겪었습니까? 고린도후서 11장에서 바울은 자신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얼마나 큰 수고를 했는지 이야기합니다.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 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는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사십에 하나 감한 매는 죽도록 맞았다는 표현입니다. 그 당시에는 사람이 40대의 매를 맞으면 죽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40에 하나 감한 39대를 맞았다는 것은 죽도록 맞았다는 표현입니다. 다섯 번이나 죽도록 맞았고, 옥에 갇히기도 많이 했고, 매도 수없이 많이 맞았고, 세 번 태장을 맞았고, 한 번은 돌로 맞았고, 세 번 배가 파선해서 일주일 바다에서 지냈고, 강의 위험, 강도의 위험, 동료 유대인의 위험, 이방인의 위험, 시내의 위험, 광야, 바다, 거짓 형제의 위험,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고 목마르고 굶고 춥고 헐벗었다고 말합니다. 이런 일을 겪으면서 바울은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겠습니까? 그 눈물이 바로 애통의 눈물입니다.

우리나라 서울 양화진에 가면 선교사 묘지가 있습니다. 다음 사진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 곳에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우리나라에 와서 죽어간 선교사들이 있습니다. 그 중에 안타까운 묘가 있습니다. 그것은 선교사 자녀들의 묘지입니다. 저항력 약한 아이들이 우리나라에 와서 풍토병을 앓고 수없이 많이 죽었습니다.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있다고 합니다. 선교사 아이들은 우리나라에 오면 거의가 죽었습니다. 그 때 우리나라는 위생상태나 모든 면이 안 좋았기에 병에 걸리면 바로 죽는 것이었습니다. 아이들을 떠나 보내면서 얼마나 많이 울었겠습니까? 주님의 일을 하다가 아이들을 이국 땅에서 떠나 보내는 그 마음, 인간적인 죄책감 얼마나 가슴 아펐겠습니까? 그 눈물이 바로 애통의 눈물입니다. 그러나 이 애통하는 눈물은 이 애통하는 눈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반드시 약속해주셨습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하나님께서 위로를 약속해주십니다. 본문에서 나온 “위로” 라는 말은 헬라어 “파라칼레오”입니다. “파라” 는 전치사 “곁으로” 라는 뜻이고, 칼라오는 동사 “부른다”의 의미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곁으로 부른다가 위로한다는 뜻입니다. 애통의 눈물을 흘리는 자에게 하나님은 부르십니다. 옆으로 오라고 부르십니다. 하나님께서 애통하는 자의 옆에 계셔서 그들을 안아주십니다. 요한계시록 21장 4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천국에서의 위로를 약속하십니다.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우리 모두 애통하는 사람이 되어 하나님의 곁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는 놀라운 복을 누리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호남의 금강산 "대둔산"

김성중 목사

- 장로회신학대학교 교수

- 기독교교육리더십연구소 소장

- 전국청소년수련회 강사

[원글] [Message] 팔복 2 – 애통하는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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