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신저. 김성중 목사

요나서 4장1~11절

성경에서 하나님의 일을 했던 인물들의 공통점은 “나의 상황, 주변의 상황과 관계없이 변함없이 하나님을 신뢰했다”는 것입니다.

 

용서의 사람 요셉은 잘난 아들이고, 자신이 꿈 꾼 것을 형들에게 말한 것밖에 없는데, 형들의 미움을 받고 이집트에 종으로 팔려갑니다. 이쯤 되면 하나님을 향한 신뢰가 떨어질 만도 한데 요셉은 자신의 상황과 관계없이 변함없이 하나님을 신뢰했습니다. 그래서 보디발의 집에서 종으로 성실하게 잘 사는데, 이번에는 보디발 주인의 아내가 자신을 유혹해서 이것을 이겨내다가 누명을 받고 억울하게 감옥에 갑니다. 이쯤되면 하나님을 향한 신뢰가 바닥에 떨어져야 하는데, 그는 변함없이 하나님을 신뢰합니다. 결국 감옥에서도 인정을 받고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로 왕의 신하들의 꿈 해몽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나중에 풀려난 신하에 의해 바로 왕의 꿈을 해석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고, 결국 이집트의 총리 자리까지 오르게 됩니다. 우리는 요셉이 이집트의 총리가 된 결과에만 주목하는 경향이 있는데, 요셉의 고난의 일생 전체를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 변함없이 하나님을 신뢰하는 그 신앙의 모습을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언제나 신뢰하는 요셉에게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를 범사에 형통하게 하셨더라.”

 

하나님으로부터 내 마음에 합한 자라는 칭호를 받은 다윗은 어떻습니까? 그는 중간에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너무나도 큰 범죄를 저지릅니다. 그러다가 나단 선지자로부터 강한 지적을 받았습니다. 그때 다윗은 변명하지 않고, 하나님께 큰 죄를 범했다고 철저하게 고백하며 울면서 간절하게 회개합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것은 그가 죄를 짓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그의 인생 가운데 실수도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변함없이 하나님을 신뢰했기 위해 노력했다는 것입니다. 시편 51:11-12의 다윗의 고백을 보면, 얼마나 그가 하나님을 붙들려 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켜 주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좋은 신앙은 어떤 신앙입니까? 한 순간에 up었다가 한 순간에 down되는 신앙은 좋은 신앙이 아닙니다. 좋을 때는 붕붕 날다가 내 생각과 판단과 다르면 바로 떨어지는 신앙은 좋은 신앙이 아닙니다. 예배 때는 예배의 감격을 누리다가 세상 속으로 들어가면 바로 떨어지는 신앙은 좋은 신앙이 아닙니다. 좋은 신앙은 주변 상황, 나의 상황, 나의 판단과 관계없이 언제나 변함없이 하나님을 신뢰하는 신앙입니다.

 

이런 면에서 오늘 본문의 요나 선지자는 불완전한 모습을 보입니다. 요나는 하나님께서 니느웨 성에 가서 회개를 선포하라고 부름 받은 선지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다시스로 가다가 풍랑을 만나서 그 풍랑에 대한 원인 제공자로 제비가 뽑혀서 바닷가에 빠져서 죽을 위기를 겪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다시 기회를 주셔서 물고기 뱃속에서 삼일 동안 회개하고 빠져 나와 정신 차리고 하나님의 명령대로 니느웨 성에 가서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하자 진짜로 니느웨 백성들이 다 회개합니다. 왕이 상복을 입고 철저하게 회개하며, 조서를 내려서 동물에게까지 금식을 선포합니다. 철저한 회개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뜻을 돌이켜서 재앙을 내리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요나는 니느웨에 회개를 선포했지만, 니느웨 백성들이 회개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라니까 억지로 한 것입니다. 요나는 이방 나라, 이스라엘을 괴롭히던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가 망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요나는 멀리서 팔장 끼고 언제 니느웨가 망하는지 보고 있는데, 진짜로 자기가 선포한 대로 회개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심판을 내리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요나는 1절에 이것을 매우 싫어하고, 분노를 표출합니다. 요나의 안 좋은 성격이 나오지요? 그리고 3절에 보면 하나님께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 내 생명을 거두어 가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 이스라엘을 괴롭혔던 니느웨가 멸망받지 않고 구원을 받는 모습을 보니까 열 받아서 못 견디겠으니 자신을 죽여달라는 것입니다. 더 살아갈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 불평을 토로하고 나서도 끝까지 미련을 버리지 못합니다. 어떤 미련입니까? 니느웨가 멸망받는 것입니다. 멸망 받는 것을 끝까지 기다려보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 원망과 불평을 토로했으니까 내 불평을 받아주셔서 니느웨를 멸망시키시겠지?” 스스로 이렇게 생각한 것입니다.

 

그리고 5절에 보면 니느웨 성에서 나가 그 성 동편에 앉아 초막을 짓고 그늘 아래 시원하게 앉아서 그 니느웨 성이 어떻게 망하는지 기다려보기로 한 것입니다. 성이 멸망받아 무너지면 자신도 죽을 위험이 있으니까 성 밖에 나와 초막을 짓고 니느웨 성이 무너지기만을 기다린 것입니다.

 

요나는 초막에 누워서 계속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너무 더워서 짜증이 날 지경이었습니다. 이때 하나님은 요나가 만든 초막 근처에 큰 박넝쿨을 준비하사 요나의 초막 위를 가리게 하셨습니다. 즉, 머리 위해 그늘이 생기게 하셔서 시원하게 하셨습니다. 갑자기 시원해지가 요나는 6절에 보면 매우 기뻐하는 것입니다. 요나는 다혈질에 감정기복이 심했던 사람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누워서 음료수를 마시면서 “세월아 내월아” 하면서 시간을 보냈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다음 날에 일어났습니다. 하나님께서 이튿날 새벽에 벌레를 보내셔서 박넝쿨을 씹게 만드셨습니다. 그러자 박넝쿨이 시들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아침 해가 뜰 때에 뜨거운 동풍을 보내셔서 요나의 머리를 쬐게 만드셨습니다. 그랬더니 요나는 괴로워하면서 스스로 죽기를 구합니다.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더 낫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참 좋으신 하나님이십니다. 저 같았으면 정말 너 진짜 죽어봐라 했을텐데 끝까지 참으시니 말입니다.

 

하나님이 박넝쿨을 보내시고, 시들게 하신 것은 요나에게 교훈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그 교훈은 10~11절에 나와 있습니다. “너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재배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라 버린 이 박넝쿨을 너가 아꼈지 않느냐...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도덕적으로 뭐가 옳은지, 신앙적으로 뭐가 옳은지 모르는 자가 십 이만여명이고, 가축도 많이 있는데, 나 하나님이 이 존재들을 아끼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느냐...내 마음 좀 깨달아 알아라...”

 

오늘 본문의 요나의 모습을 통해 나의 모습이 비칩니까? 요나의 모습이 나의 모습은 아닌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우리도 내 뜻과 판단, 내 상황과 주변 상황에 맞으면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렇지 않으면 신뢰도가 떨어지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상황과 여건과 나의 판단과 관계없이, 세상에 어떠한 일이 다가온다 할지라고 변함없이 하나님을 신뢰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럼, 변함없이 하나님을 신뢰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 답은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정확히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나는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알기는 알았습니다. 그러나 정확히는 알지 못했습니다. 2절에 보면, 요나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그런대로 알고 있습니다.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이 구절은 요나가 말한 것이 아니라 출애굽기 34장 6절~7절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요나는 자신이 잘못했을 때, 하나님이 용서해주시고 물고기 뱃속에서 살리신 것을 기억하면서 하나님께서 은혜로우신 분이시고,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분이심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 말씀이 자신을 포함한 유대인들에게만 해당되는 줄 알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유대인의 하나님뿐만 아니라,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는데 그것을 인식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유대인의 하나님으로 국한되는 분이 아니라, 전 세계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천지를 창조하시고, 온 만물을 만드시고 주관하시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심지어 마태복음 5장 45절을 보면, 하나님은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시는 누구에게나 자비를 베푸시는 분이심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이 누구신지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 신앙생활을 하면 할수록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늘어가야 합니다. 나의 이익을 위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껴 맞추면 안 됩니다. 오늘 요나처럼 은혜롭고 자비롭고 노하기를 더디하시고 인애가 크시다는 사실을 나에게만 적용하면 안 됩니다.

 

왜 지식, 앎이 중요합니까? 바로 안 만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사랑한 만큼 아는 것도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사랑에 있어서 감정적 요소를 배제하고 객관적으로 바라보면, 안 만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알게 된 만큼 믿고 신뢰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지식과 사랑과 믿음은 함께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4장 13절에서 바울은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에베소 교회를 위해 기도할 때 “하나님을 알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에베소서 1장 17절에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라고 기도합니다. 그럼, 하나님을 어떻게 하면 정확히 알 수 있을까요? 에베소서 1장 17절의 기도를 잘 주목하면 답이 나옵니다.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지혜와 계시의 영이 누구이십니까? 바로 성령님이십니다. 성령님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을 정확하게 알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기억하면서 우리는 언제나 어느 때나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도록 기도하고, 성령님을 통해서 하나님을 온전히 알고, 믿고, 사랑할 수 있도록 항상 기도해야 합니다. 아멘.

김성중 목사

- 장로회신학대학교 교수

- 기독교교육리더십연구소 소장

- 전국청소년수련회 강사

[출처] [Message] 기도시리즈8 _ 하나님을 언제나 신뢰하는 삶을 위한 기도|작성자 꿈틀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