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신저. 김성중 목사

누가복음 2장1~14절

여러분은 태어날 때 어디서 태어났나요? 집? 병원? 대부분은 병원에서 태어났을 것입니다. 큰 산부인과에서 태어난 사람도 있겠고, 작은 산부인과에서 태어난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옛날에는 애를 낳다가 죽는 경우가 많이 있었습니다. 그만큼 애를 낳는 것이 위험했습니다. 그러나 요즘은 애를 낳다가 죽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의학이 발전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시대는 달랐습니다. 의학이 발전되어 있지 않아서 애를 낳다가 죽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애를 낳을 때 더 편한 장소, 더 안락한 장소, 불안하지 않는 장소가 필요합니다. 산모의 심리적 안정이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는 그러한 평안함을 누릴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 시대 때는 로마가 이스라엘을 지배하던 시대였습니다. 그 당시의 로마황제는 2장1절에 보면, 가이사 아구스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아구스도 황제의 본명은 가이우스 옥타비우스(Gaius Octavius)입니다.

그는 통치를 수월하게 하기 위해 로마가 다스리던 모든 나라 사람들의 인구를 조사하게 합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호적하러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예수님의 아버지 요셉은 이스라엘 나사렛이라는 동네에서 살고 있었는데, 원래 그의 고향은 베들레헴이었습니다. 그래서 요셉은 약혼한 마리아와 함께 베들레헴에 호적하러 부랴부랴 올라갔습니다. 이 베들레헴은 다윗의 동네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즉, 다윗왕이 태어난 곳이었습니다. 즉, 요셉은 다윗왕의 후손인 것이었습니다. 부인 마리아는 언제 애를 낳을지 모르는 상황이었지만, 부인도 호적을 해야 하고, 더구나 산달이 가까운지라 항상 옆에 있어야하기 때문에 가야만 했습니다. 베들레헴은 예루살렘으로부터 약 7.2Km 떨어졌고 나사렛에서는 약 144Km 떨어진 곳이었습니다. 나사렛에서 베들레헴으로 가는 도중 드디어 마리아가 애를 낳아야 하는 급박한 상황이 도래했습니다. 요셉은 여관을 알아보았으나 인심이 사나운지 한 곳도 여관방을 내어주지 않았습니다. "이러다가 아이가 잘못되면 어떻게 하지?" 라는 두려움도 들었습니다. 그러다가 어떤 여관에 갔을 때, 여관방은 없고, 여관의 마굿간이 있는데 거기에서 애를 낳지 않겠냐는 말을 들었습니다. 선택의 여지가 없이 요셉과 마리아는 말들이 있는 마굿간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말의 울음소리를 들으면서 아이를 낳았습니다. 그리고 아이를 말의 밥통 즉, 말구유에 지푸라기를 깔고 눕혔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아이가 누구입니까? 하나님이신 예수님이십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 오셨는데, 왕궁에 오셔도 모자를 판에 사람이 사는 곳도 아니고, 말들이 사는 마굿간에서 태어나신 것입니다. 우리의 구세주, 우리의 왕 예수님께서 산부인과도 아니고, 평안한 집도 아닌 말들이 울고, 말똥 때문에 냄새나는 마굿간에서 태어나신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 마굿간에서 태어난 사람 있습니까?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아무리 가난해도 마굿간에서 태어난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이신 우리 예수님은 모든 권세와 영광을 버리고 낮아지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위에 군림하시기 위함이 아니라, 우리의 눈높이를 맞추어 주기 위해서 우리에게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낮추신 자신의 삶을 보여주시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실 때부터 가장 낮게, 가장 가난하게 오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겸손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것을 가지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모든 것을 누릴 수 있는 완전한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과 눈높이를 맞추시기 위해, 더 나아가 이 세상에서 헐벗고, 굶주리고, 소외되고 아픈 사람들과 눈높이를 맞추고, 그들에게 위로를 전해 주시기 위해 자세를 낮추셨습니다. 그리고, 인간들의 마음을 동감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겸손입니다.

겸손은 가진 자가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없는 자가 겸손하다고 말하면 그것은 자기 합리화가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가진 자가 가진 체 하지 않고, 낮아져서 어려운 사람의 마음을 동감하고, 위로한다면 그것이 바로 겸손인 것입니다.

예를 들어, 공부 잘 하는 자가 알지만 아는 체 하지 아니하며, 낮아져서 공부 못 하는 자의 마음을 이해하고, 동감하며 나의 이익을 생각하지 않고, 그 아이가 공부 잘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바로 겸손인 것입니다.

빌립보서 2장5~8절을 보면, 예수님의 겸손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나와 있습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빌립보서에서 바울은 예수님이 하나님과 동등되시는 분이시지만,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하시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모습을 가지고 이 땅에 오셨고, 자기를 낮추시는데,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자기를 낮추셨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일관된 삶을 사셨습니다. 그 일과된 삶이 바로 자기를 낮추는 삶이셨습니다. 오실 때 낮추셨던 그 겸손한 모습 그대로 죽으실 때도 가장 낮고 천한 십자가의 죽음의 모습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이렇게 낳고 천하게 오신 예수님의 탄생, 즉, 온 세상을 구원하신 구원자가 오심을 제일 먼저 알았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은 공부 많이 한 교수님들도 아니었고, 돈이 많은 부자 사업가도 아니었습니다.

그 당시의 황제와 정치가들도 아니었고, 집안 배경이 좋은 사람들도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을 제일 먼저 알게 된 사람들은 바로 이스라엘의 목자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목자들에게 예수님의 탄생소식을 제일 먼저 알려 주었습니다. "그 지역에 목자들이 밤에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더니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그들을 두루 비추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그 당시 이스라엘 사회의 여러 가지 직업들 중에서 목자라는 직업은 아주 천시되었습니다. 사회적으로 천대받던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제일 먼저 알게 하셨습니다. 더 나아가 나중에 예수님은 자신을 목자라고 나타내기도 하십니다. 요한복음 10:11에 보면, "나는 선한목자라. 선한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사회적으로 가장 천대받던 사람들, 소외받는 사람들에게 알리셨습니다. 예수님은 아무 배경도 없고, 사회적으로 소외받고,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 아무 희망없이 살아가는 그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만 믿으면, 그들도 하나님 나라에 갈 수 있고, 하나님 나라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을 전해 주신 것입니다. 강자의 편을 드시기 보다는 힘없고 소외된 약자의 편을 들어주신 겸손을 몸으로, 삶으로 표현하신 것입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 우리의 구주 예수님은 겸손의 왕이셨습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를 없애시기 위해 친히 인간의 몸으로 낮아져서 오셨습니다. 그것도 종의 모습으로, 가장 낮고 천한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사람이 사는 곳도 아닌, 말이 사는 마굿간에서 태어나셨고, 말의 밥통인 말구유에 눕히셨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모든 사람, 특히 가난하고 소외되고, 천대받고 아무 희망 없는 사람들에게 희망과 위로, 용기, 회복, 구원을 주시기 위해서 겸손한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신 소식은 기쁨의 소식입니다. 행복한 소식입니다. 이 기쁨과 행복의 소식을 제일 먼저 낮고 천하고, 소외받았던 목자들이 가장 먼저 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제일 먼저 이들에게 알려 주신 것입니다.

김성중 목사

- 장로회신학대학교 교수

- 기독교교육리더십연구소 소장

- 전국청소년수련회 강사

[출처] [Message] 예수님의 삶을 본받아(1) _ 탄생으로 보여주신 겸손|작성자 꿈틀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