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신저. 김성중 목사

시편 66편 16절

여러분! 우리도 이 시대에 다니엘이 되어야 합니다. 다니엘이 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우선 하나님을 지속적으로 뜨겁게 만나는 것입니다.

 

저는 고등학교 1학년 겨울 방학 때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하나님과 만나고 나서 저에게 일어난 변화는 간단했습니다. 하나님과 만나고 나서 저에게 일어난 변화는 간단했습니다. 하나님과 만나고 나서 저는 제 좌우명이 바뀌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의 좌우명은 무엇입니까? 저의 좌우명이 무엇이었는줄 아십니까? “나는 내 삶의 주인이며, 내 삶의 주관자이다”입니다. 정말 멋있지요? 자신감 넘쳐 보이지요? 그러나 기독교적인 관점으로 볼 때 그것은 멋진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저는 이 좌우명이 너무나 멋있었고, 또한 이 좌우명처럼 내가 내 삶의 주인이 되어 살았습니다. 저는 이 좌우명은 방 곳곳에 붙이고, 벽에 붙이고, 필통에 붙이고 그러면서 다녔어요. 그러나 하나님 만나고 집에 와서 제일 먼저 했던 일은 그 좌우명을 바꾼 것이었어요. 어떻게 바뀌었냐면, 제 좌우명의 주어만 바뀐 것이었어요. 그러니까 맨 앞의 “나” 가 “예수님”으로 바뀐 것이었어요. “예수님은 내 삶의 주인이며, 내 삶의 주관자이다.”라고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복음 전도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저는 수련회 마치고 집에 와서 문방구에서 큰 지도를 하나 구해서 거기에 자료들을 찾아서 색깔 스티커로 “복음화 지역” “미복음화 지역, 미전도지역” 등등을 표시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미전도지역을 붙잡고 하루하루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다음 저만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에 가지고 가서 친구들과 함께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럼, 하나님을 만나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간단합니다. 마음 문을 열고 집중해서 하나님을 찾으면 됩니다. 요한계시록 3장20절에 보면,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고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문 밖에서 두드리십니다. 예수님은 인격적인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 마음 문을 두드리십니다. 그러면 누가 문을 열어야 합니까? 내가 문을 열어야 합니다. 여는 주체도 나고, 열지 않는 주체도 나입니다. 내가 문을 열면 그때 예수님께서 오셔서 만나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베스트 프렌드가 집에 놀러 왔을 때 어떻게 문을 열지요? 기뻐서 빨리 열어주지요. 만약에 만나기 싫은 친구가 오면 억지로 열 때가 있지요? 아니면 집에 있는데도 없는 척 할 때도 있지요? 예수님께서 내 마음 문을 두드리시는데 우리는 어떻게 내 마음 문을 열어야 합니까? 인상 쓰면서? 그럼 예수님이 오셔도 친하지 못하고 서먹합니다. 문을 열어주지 않으면 들어오실 수 없고요. 베스트 프렌드에게 문 열어주듯이 기쁘게 문을 열면 예수님께서 기쁘게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기쁘게 마음 문을 여는 모습이 바로 간절히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33장3절에는 다음과 같이 나와 있습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간절하게 찾으십시오. 또한, 예레미야 29장13절에는 다음과 같이 나와 있습니다.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

 

다니엘은 하나님을 뜨겁게 만난 사람이었고,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니까 존경하게 되고, 사랑과 존경이 합쳐져서 하나님을 경외하게 되었습니다. 경외는 문자 그대로는 “두려움”입니다. 그런데 “두려움”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길 가다가 무서운 사람이 나타나서 위협이 되어 느끼는 두려움입니다. 예수님께서 비판하신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물리적으로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율법의 조항들을 하나하나 다 지키려고 했습니다. 율법의 핵심인 사랑 때문에 지킨 것이 아니라, 벌 받을까봐 두려워서 지켰습니다. 이렇게 신앙생활하면 위험한 것이 하나님을 오해합니다. 무서운 하나님으로 오해합니다. 그러니까 관계가 깊어질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문제는 사람은 보상심리가 있기 때문에 율법을 다 지키면 복을 달라고 합니다. 율법 지키는 목적이 복입니다. 이것이 기복주의입니다. 복 받고 싶어서 율법 지키고 신앙생활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 지켰으니까 우월감에 빠지고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은 정죄한 것입니다. 정죄는 남을 내리고 나를 높이는 것이기 때문에 명예와 관련되어 있고 이것도 결국은 보상심리가 작동한 것입니다. 이러한 신앙생활을 하면 안됩니다.

 

두 번째 두려움은 우리가 가져야 하는 경외의 두려움입니다. 경외의 두려움은 단순히 물리적으로 두려워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너무나 훌륭한 스승님이 계실 때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못한다.”라는 말을 하잖아요. 너무나 존경하니까 거기서 나오는 두려움입니다. 존경의 시작은 사랑입니다. 너무 사랑하니까 존경하게 되고, 상대방에게 맞추게 됩니다. 사랑하는 사람한테 맞추는 것이 의무입니까? 좋아서입니까? 좋아서입니다. 하나님을 너무 사랑하고 존경하면 하나님께 맞추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연스럽게 진행되는 것입니다. 연애할 때가 누군가를 사귈 때 생각하면 됩니다.

 

다니엘은 하나님을 물리적으로 두려워했던 자가 아니라 하나님과 깊이 있게 교제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존경해서 경외하던 자였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그는 바벨론 우상에게 바쳐진 음식을 먹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그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시편 66편16절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너희들아 다 와서 들으라 하나님이 나의 영혼을 위하여 행하신 일을 내가 선포하리로다”고 나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신앙의 전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자격이 있다는 것입니다. 모세오경에서 제일 많이 나오는 명령은 바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라. 하나님을 경외하라는 것입니다.

 

다니엘과 같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인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김성중 목사

- 장로회신학대학교 교수

- 기독교교육리더십연구소 소장

- 전국청소년수련회 강사

[출처] [Message] 다니엘 시리즈(2) _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인|작성자 꿈틀이